[보수 패망 36년사] ① 한국형 총보수 민자당의 탄생과 수도권 상실의 기원

보수 정당은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단순히 국민의힘이 극우화되었다, 내지는 유튜브 기반 강성 우파의 목소리만 커졌다고 답하는 건 오답에 가깝다. 국민의힘에서 극단적 대안 우파 세력이 커진 것은, 선거 패배의 결과에 가깝기 때문이다. 민주당 진영에서 한창 유행하던 부정선거 음모론이, 2016년 총선 이후 쑥 들어간 것이 이를 방증한다. 음모론과 극단적 주장이 힘을 받는 건 승리의 전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보수에는 승리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2024년 윤석열 전 대통령이 일으킨 비상계엄 사태가 각각 태극기 부대와 ‘윤어게인’의 득세로 귀결되었는지 원인을 따져봐야 할 것이다. 통상의 정치 공간으로 복귀할 수 있는 일종의 회복탄력성을 보수 정당이 상실하게 된 것이 핵심 문제라는 의미다. 아울러 2016년 4월 총선 이후 급격하게 수도권 선거에서 패배하고, 지지자 연합이 급격하게 와해한 원인을 규명하는 것도 중요하다.

2025년 3월 세이브코리아 국가비상기도회에서 장동혁 의원(현 국민의힘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유튜브 '장동혁의 끝장TV' 캡처

[보수 패망 36년사] 시리즈는 1987년 제6공화국의 보수 정치 세력과 지지자 연합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해체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본다. 특히 1990년 3당 합당 출범한 민주자유당의 특징과, 민자당이 만들어낸 한국형 총보수연합이 어떻게 허물어져 갔는지 역사적 경과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복고적 재분배 연합과 뉴라이트 담론의 취약성을 살핀다. 2016년 4월 총선 이후 보수 정치 연합의 추락은 그간의 문제가 누적되어 폭발한 사건에 가깝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지지자 연합의 사회구조적 변동과 보수 내부에서 외연 확장 경쟁이 일어나지 않은 내부 구조가 배경임을 살필 것이다.

먼저 이번 1편에서는 민주자유당 탄생의 의미와 민자당의 취약성, 그리고 대항 세력인 민주당이 어떤 지지자 기반을 갖고 수도권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는가 다룬다. 이는 보수 정치 세력이 수도권을 잃어버린 과정의 뒤집힌 모습이기도 하다. 2편에서는 그에 대한 대응이 2000년대 중반부터 어떻게 이루어졌고, 이명박‧박근혜 집권을 이끌었는지 살필 것이다. 그리고 누적된 취약점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하고, 통제 불능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태동: 1990년 3당 합당과 한국형 총보수

1990년 3당 합당 발표

국민의힘은 1990년 민주정의당(노태우),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이 합당해 출범한 민주자유당(민자당)에서 시작됐다. 민자당 등장의 의의는 제6공화국 정치의 한 축을 맡게 될 한국형 총보수연합이 만들어졌다는 데 있다.

1987년 대선은 민정당이 내세우는 ‘위대한 보통 사람의 시대’에 다수의 유권자가 호응하면서 노태우가 승리하게 됐다. 노태우는 대구‧경북에서만 1위를 해서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었다는 게 중요하다. 서울 득표율은 30.0%로 김대중(32.6%)과 비교해 큰 차이가 나지 않는 2등이었고, 인천(39.4%), 경기(41.4%), 충북(46.9%)에서는 각각 2위였던 김영삼(30.0%, 27.5%, 28.2%) 대비 상당한 차이를 벌리며 1위를 차지했다. 부산‧경남에서도 2위로 상당히 선전했다. 노태우의 당선은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뒤, 사회 안정을 원했던 유권자 특히 중산층이 지지한 결과였다.

하지만 민정당 단독으로 과반을 차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김영삼과 통일민주당을 끌어들였다. 김영삼의 기반은 부산‧경남, 그중에서도 산업화로 형성된 동남권 중산층이었다. 여기에 더해 1960~1980년대 신민당 계열 정당을 지지해왔지만 평화민주당(김대중)에 거리감을 느끼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유권자 집단도 주된 기반이었다. 김종필이 이끄는 공화당은 충청권, 특히 충남이라는 지역 기반이 핵심이었다. 아울러 충청권에서 서울‧인천‧경기도로 이주한 중하층 노동자와 자영업자도 중요한 지지층이었다.

1980년대 울산 동구 전하동에 현대중공업 사원들을 위해 지어진 일산아파트

민자당 출범의 의의는 박정희 시대에 만들어진 산업화 세력, 즉 재벌‧관료‧자산가 집단과 수도권의 온건한 화이트칼라와 중산층, 산업화의 결과로 동남권에서 형성된 중산층이 정치적으로 결합했다는 데 있다. 여기에 더해 영남권 전체와 충청도로 지역 기반이 확장됐다. 이는 해당 지역에 기반한 엘리트 집단이 민자당을 경유해서 중앙정부의 각종 자원을 배분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민자당’이라는 명칭이 시사하듯, 한국형 총보수는 1955년부터 38년간 장기 집권한 일본 민주자유당과 흡사했다. 하지만 일본과 달리 민자당은 여러 가지 구조적 약점이 있었다. 먼저 유권자들을 묶어 내는 사회적 인프라가 빈약했다. 각종 관변 단체를 통해서 시민 사회 전반으로 침투하고, 그 네트워크로 일종의 후견 관계를 만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위로부터의 동원’이었지 시민 사회 그 자체에 뿌리내린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로 산업화 과정에서 대규모로 발생한 이주민들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도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수도권의 경우 호남과 충청 출신이 많았고, 하층 노동자나 영세 자영업자였다. 민자당의 재분배 기획에는 중산층은 있었지만 도시 빈민 집단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세 번째는 정치 보스들이 타협한 결과물이라, 얼마든지 다시 분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의 동거가 깨지는 순간 내구도가 약해지는 기계적 결합이었다.

DJP연합과 노무현: 도시 빈민과 중산층의 결합

합당 5년 만인 1995년, 총보수연합의 균열이 시작됐다. 그 해 지방선거에서 통합민주당의 조순이 서울시장에 당선됐고, 김종필이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조순의 당선은 수도권에서 민주당 계열 정당의 성장을, 김종필의 탈당은 충청과 그 이주민의 이탈을 각각 의미하는 것이었다. 두 사건은 산업화의 결과물인 도시 빈민(도시에 이주한 하층)과 고학력 도시 중산층이 한 정치 진영으로 묶이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 해안도시 이즈미르의 게제콘드/CC by Veyis Polat 

도시 빈민과 고학력‧고소득 중산층의 정치적 결합은 승리 공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강력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곳이 튀르키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이끄는 정의개발당(AKP)은 ‘게제콘두’라 불리는 빈민가에 모여 살던 하층 이주민과 1980년대 이스탄불 밖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급격하게 성장한 중산층의 지지를 받고 2002년부터 지금까지 장기집권하고 있다. 에르도안부터 이스탄불의 빈민가인 카슴파샤에서 가난한 이주민 선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하층 노동계급 특유의 거친 말투와 살짝 삐딱한 걸음걸이를 바꾸지 않고 과시하듯 드러낸다.

수도권의 달동네에 모여 살았던 이들의 원적지를 따라가면 호남뿐만 아니라 충청권 비율도 높다. 2022년 한국갤럽이 조사한 인천‧경기 유권자의 원적지 분포를 보면 광주‧전라가 19.9%, 대전‧충청이 18.3%, 인천‧경기가 18.4%였다. 충남 해안 지역 사람들이 서해안 뱃길을 따라 이주한 인천의 빈민가엔 충청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가 섞여서 들리는 경우가 많았다. 김대중과 김종필이 연합해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것의 의미 중 하나는 충청권 이주민들의 민주당행을 막았던 교차압력(여러 가지 사회집단에 속해 있는 경우에 받게 되는 다른 방향의 당파적 압력)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수도권 선거에서 호남과 충청 이주민의 결합은 승리 연합을 만들어냈다. 1990년대 종로구청장 선거는 대표적 사례다. 원래 종로구 선거에서는 일대에 살고 있던 엘리트층과 영남권 이주민이 만든 지역 정치 연합이 우세했다. 1991년 종로구 의회 선거에서 22명 중 21명이 민자당, 1명이 평민당이었다. 그러다 민주당계 정당(새정치국민회의) 당선자는 1995년에는 5명, 1998년 10명으로 증가해다. 충청 이주민 집단이 국민회의 후보를 지지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창신동, 무악동, 명륜동, 종로3가 등에 몰려 살던 이들이 새롭게 승리연합을 결성하고, 그렇게 해서 당선된 구청장이나 지방의회 의원들인 관변단체를 개편하면서 점차 지역에서 주도권을 강화해 나갔다.

2002년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을 계기로 1980~1990년대 급격하게 늘어난 대졸 중산층이 민주당의 지지 기반이 됐다. 386세대라고 불리는 80년대 학번-60년대생으로 명문대를 졸업하고 30대 중후반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른바 ‘86세대’는 80년대 초반 대학 정원 증가로 등질적인 대규모 집단을 형성했으며, 급격히 성장했던 기업들이 빠르게 규모를 늘렸던 대졸 사무직 또는 엔지니어 노동자로 각종 조직에서 가파르게 승진해 허리 역할을 했다. 그리고 80년대 학생운동과 6월 항쟁의 승리라는 공통 기억이 있었다.

2002년 서울 여의도 대선 유세 도중 제스처를 취한 노무현 대통령 후보/노무현 재단

이들은 1997년 IMF 외환위기로 ‘내려갈 수 있다’라는 하강 위험을 처음으로 체감하게 됐고, 동시에 대기업들이 질적 성장에 나서면서 새로운 기회를 붙잡았다. 경제적 실력과 자신감을 갖춘 그들에게 정치‧사회 영역이 새로운 프런티어로 인식되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새로운 중산층들의 정치적 욕구는 ‘체제가 무너지는 것은 원하지 않지만, 룰은 공정해야 한다’, ‘경쟁은 하되, 반칙·특권은 없어야 한다’, ‘기득권 카르텔을 깨야 한다’라는 방향으로 분출된 것이 노무현 당선을 이끌었다. 일종의 2002년판 ’공정‘이다. 노무현은 능력과 도덕성으로 승부 보고 싶지만, 구조적 벽에 가로막혀 있다고 느끼는 중산층의 자기 이미지와 정확히 겹쳤다.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같은 노무현의 슬로건은 중산층의 세계관과 정확히 조응하는 것이었다.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을 중심으로 결집한 담론, 이데올로기, 인물, 조직은 모두 ‘새로운 주류가 되겠다’라는 중산층의 욕망을 대변했다. 386은 단순한 세대의 표지가 아니라, 이들 중산층의 계층적 표지, 다시 말해 1980년대 초반 대학 교육 확대와 그 배경이 된 대기업의 성장을 기반으로 해서 경제력과 직업 지위, 문화자본, 네트워크를 가진 집단임을 상징하는 단어였다. 이들이 스스로를 ‘시민’, ‘상식’으로 규정한 상징 전략은 1987년 노태우가 중산층을 ‘보통 사람’이라 부르고 새로운 사회와 정치의 주체로 규정한 방식과 닮았다.

다음 질문: 이명박·박근혜의 승리는 무엇을 가렸나

2002년 노무현 당선은 보수에게 충격이었다. 총보수연합이 IMF외환위기라는 비상시국이 아닌 평상시에 치러진 선거에서 치러질 정도로 약해졌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중반 시도된 다양한 보수의 ‘혁신’ 시도는 그 도전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리고 이명박, 박근혜의 대선 승리로 이어졌다.

문제는 보수의 승리 이면에 쌓이고 있던 취약성이었다. 2002년 패배에도 불구하고 보수의 지지자 연합은 여전히 강했다. 영남, 산업화 세력, 수도권의 자산가들, 자영업자 등 구(舊) 중산층이라 할만한 이들은 여전히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에 표를 던졌다. 그리고 수도권의 중산층 상당수도 보수 정당에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지자 연합의 구성을 변화된 환경에 발맞춰 바꾼 결과가 아니라, 산업화 시대의 성공 서사를 다시 한번 동원한 것에 가까웠다.

뉴라이트 같이 2000년대 이뤄진 보수의 혁신 시도가 안고 있던 근본적인 맹점은 여기에 있었다. 동시에 그것은 보수 정치 내부 동학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다음 편에서는 2000년대 이후 보수의 변화가 어떻게 2016년 구조적 붕괴를 만들어 냈는지를 살핀다. 이를 통해 보수의 붕괴는 선거 패배라는 외인(外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의 문제에 못 이겨 발생한 내파(內破)에 가깝다는 점을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