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패망 36년사] ② 카드로 만든 집: 복고적 분배 연합과 문화전쟁의 귀결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10년간 보수 정치는 왜 그렇게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었는가? 그리고 왜 보수 정치는 제대로 된 이념, 정책, 인물, 조직이 없고 유튜브와 SNS 기반의 극단주의 세력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가? 그리고 보수 진영이 여러 분파로 잘게 쪼개지고, 각 분파를 한데 엮어낼 수 없고, 서로 적대하는 파편화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
지난주 <① 한국형 총보수 민자당의 탄생과 수도권 상실의 기원>에서 우리는 1990년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한국형 총보수연합의 특징(및 취약성)과, 그것이 1990년대 중반 이후 사회적 기반을 잃어가는 과정을 살폈다. 2002년 노무현의 당선은 산업화로 대도시로 이주한 하층민과 경제 구조 고도화에 힘입어 등장한 새로운 중산층 집단의 결합을 의미했다.
2000년대 보수 정치는 대항 헤게모니 세력의 성장에 맞서 여러 ‘혁신’을 시도했고,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또 뉴라이트라는 이름이 붙은 일련의 사회, 문화 운동을 전개했다. 정치뿐만 아니라 담론과 문화, 사회운동 영역에서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리고 2015년까지는 보수 정치의 우위는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2016년 이후 보수가 급격하게 무너진 것은, 이 같은 ‘혁신’이 ‘누구의 지지를 얻을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내세워 지지를 얻을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서 변화를 회피했기 때문이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분배 연합의 포장지를 바꾸는 시도에 가까웠다. 오히려 더 나빴다. 산업화 분배 연합은 중산층, 나아가 중하층까지 광범위하게 끌어들이는 데 적잖이 신경 썼지만, 2010년대 즈음이 되면 보수는 부동산 가격과 자산 과세 반대에 매달리는 자산가들로 기반을 좁혔다. 포장지 안 내용물은 오히려 더 부실해졌다. 아울러 미국 신우파 담론을 수입하고 적극적으로 벤치마크 한 뉴라이트는 반공과 산업화라는 과거의 서사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작업에만 매달렸다.
결국 ‘지지자’를 새롭게 구하는 데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보수 정치는 카드로 만든 집(house of cards)에 가까워졌고, 그 결과 2016년 총선 이후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게 됐다. 회복 탄력성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이명박‧박근혜: 복고적 산업화 아이돌
2002년 대선에 뒤이은 2004년 총선 결과는 보수 정치 세력이 전국 단위 선거, 특히 수도권 선거에서 더 이상 우위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런데 2004년 총선 승리 이후 노무현 대통령과 여당인 열린우리당 지지율은 급전직하했다. 한국 경제의 성공과 고도화에 의한 격차 확대 때문이었다. 이주민 출신 수도권 중하층과 60년대생 중산층으로 구성된 민주당의 지지자 연합은 와해할 수밖에 없었다.
흔히 진보 진영에서는 IMF 외환위기가 신자유주의라는 악(惡)을 불러들이고, 그것이 불평등을 키웠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보통 격차가 확대되는 것은 늘어난 파이가 불균등하게 배분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네이버, 미래에셋 등의 성공이 상류층과 상위 중산층의 소득을 늘렸고, 그것이 자산 가격을 끌어올리면서 급격히 격차를 키웠다. 수출 대기업과 나머지, 대기업 직장인‧전문직과 나머지의 격차는 계층 간 라이프스타일의 차이로 나타났다. “수정씨의 집은 래미안입니다”라는 광고 문구로 화제를 모았던 삼성물산의 래미안 아파트 광고 이후 나타난 주거의 브랜드화가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2000년대 중반 당시 한나라당이 노무현을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라 맹공한 것이 호응을 얻은 것은 격차 확대에 따른 불만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은 ‘부자 되세요’라는 욕망을 자극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강력함은 산업화의 성공 서사를 현재의 필요에 의해 변형해서 재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서울시 버스 체계 개편과 청계천은 그가 1960년대 태국 건설 현장에서부터 보여주었던 추진력이 2000년대 한국 사회에서도 통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였다. 뉴타운은 노태우의 주택 200만호 건설 계획과 같이 꽤 고전적인 중산층 주택 공급과 자산 형성 지원 정책이었다.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문구를 모두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옛날 다른 한국인들처럼 가난하고 평범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스타 CEO로 각광받고, 대중 매체에서까지 주인공으로 삼은 그의 일대기는 ‘복고적 산업화 아이돌’이라 할만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에서 이명박의 서사는 박정희보다 훨씬 소구하는 계층이 좁았다. 박정희의 집권과 산업화는 1950년대 한국을 지배하던 기득권을 몰아내고, 평범한 이들에게 상승 기회를 주는 강력한 사다리로 기능했다. 누구나 열심히 근검절약하고 일하기만 하면 남부럽지 않은 삶을 도모할 수 있었다. 산업화 세대가 박정희를 떠올리는 건 단순히 ‘잘 먹고 잘살게 됐다’에 그치는 게 아니다. ‘내가 잘 먹고 잘살게 됐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명박의 경제 살리기가 지향하는 집단은 자산이 많고, 나이가 들었고, 지킬 게 많은 이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근본적으로 노무현 정부 당시의 격차 확대를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정권 후반부 ‘공정’이란 화두를 던지긴 했지만 말이다.
이 점에서 또 다른 산업화 아이돌 박근혜의 정치적 기반도 이명박과 다르지 않았다. 홍지연 미국 미시간대 교수, 박선경 고려대 교수, 양현주 서강대 교수는 2022년 논문에서 박정희 시기 새마을 운동이 활성화되었던 지역일수록 2012년 대선 박근혜 득표율이 높았다는 연구를 내놓았다(‘In Strongman We Trust: The Political Legacy of the New Village Movement in South Korea.') 특별시·광역시를 제외하면, 1974~1978년 받은 지원금이 1% 많을수록 박 후보 득표율이 1.5%포인트씩 높았다. 박근혜는 경제민주화를 내세워 중도 유권자를 장악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에선 건강보험을 도입한 주역 중 하나였고, 노태우 정권에서는 재벌개혁을 밀어붙였던 김종인을 끌어들이는 등의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변화하는 한국 사회에 걸맞게 보수의 지지자 연합을 재구성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산업화 시대의 서사를 반복하고, 상황에 맞게 레토릭을 바꾸는 것에 가까웠다. 서울 몇몇 지역에 모여있는 엘리트들, TK와 PK의 산업화 지역 동맹. 자영업자 등 구(舊) 중산층, 반공과 박정희를 통해 동원하는 고령층이라는 지지자 연합의 구성은 거의 동일했다. 그리고 노태우에서 시작된 한국형 총보수 특유의 중산층 지향 분배 정책은 시간이 갈수록 잊혀졌다. 대신 ’자산 가치를 지켜드립니다‘라는 노골적인 자산가 지향 정치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졌다.
뉴라이트: 미국 신우파를 차용한 보수 나르시시즘
2004년 자유주의연대의 출범을 계기로 보수의 이념적 혁신 운동, 시민 사회에서의 ‘진지전’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른바 ‘뉴라이트’다. 자유주의연대는 신지호(18대 국회의원),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사무국장을 지낸 홍진표, 고려대 총학생회 출신인 최홍재(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 선임행정관) 등 전직 운동권들이 주축이었다. 2005년에는 교과서포럼, 자유주의교육연합, 뉴라이트싱크넷 등이 출범했다. 이들은 뉴라이트네트워크를 결성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김진홍 신광두레교회 원로목사 등 개신교를 비롯해 전통적인 보수 세력이 대거 참여한 뉴라이트전국연합이 결성됐다.
뉴라이트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진보 진영의 세력 확대를 일종의 ‘세계관’의 문제로 봤다는 것이다. “(북한과의) 전쟁과 반공을 통해 형성된 국민정체성”(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일종의 공세적 반작용이었던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던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 등 소위 4대 개혁입법은 당시 반공-보수의 전통적 세계관에 대한 구체적인 위협으로 인식됐다.
두 번째는 1970년대 등장한 미국의 신보수주의 또는 신우파운동을 상당 부분 차용했다는 것이다. 신보수주의의 ‘문화전쟁’의 방법론을 사실상 그대로 수용해 사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낙태·가족·종교·동성애·학교·애국주의·총기 등 문화전쟁의 소재들이 친북·좌파·반대한민국·종북·반미·주사파로 변형되어 수용됐다. 또 1960년대 확산된 급진주의에 맞서서 ‘미국은 선한 나라다’, ’서구문명과 자유민주주의를 방어해야 한다‘는 신우파의 논리는 ’역사 바로 세우기‘로 바뀌었다. ’북한 인권‘ 등 스스로의 언어와 가치를 만들어내고, ’프레임‘이라는 전장에서 우위에 서려고 했다. 그리고 다양한 시민단체, 싱크탱크, 매체를 만들어내면서 일종의 ‘대항 헤게모니’를 창출하겠다는 의식적인 노력을 했다.
하지만 한국의 뉴라이트는 미국의 신우파와 달리, 보수 내부를 향한 언어에 가까웠다. 이들은 기존의 반공-산업화의 세계관이 여전히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미국 신우파의 방법론을 가져왔다. ‘역사 바로 세우기’가 대표적이다. 역사바로세우기는 크게 세 가지 ‘상징’을 다시 정당화하려는 작업이었다. 먼저 일제 식민지 시기다. 뉴라이트는 식민지 시기의 근대화를 강조하면서 기존의 엘리트들이 ’반민족적‘이라는 진보 진영의 공격에 대한 대항 서사를 만들려 했다. 두 번째는 박정희의 산업화를 현대사의 핵심적인 성취로 만들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승만을 복권시키려는 재평가 작업이었다. 이들은 건국-산업화-민주화라는 현대사의 세 분기점에서 건국과 산업화의 정당성을 회복하고, 강화하는 것을 ‘새로운 우파’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뉴라이트는 기존 보수 세력에게 “당신들은 틀리지 않았다”라는 메시지를 던질 뿐, 경제·사회·문화 영역에서 발생한 새로운 균열을 포착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기획이 아니었다. 일종의 보수 나르시시즘이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상당수 뉴라이트 인사들이 정치권으로 진입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들의 ‘투쟁’은 기존 보수 진영 내 인사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2012년 “지식인, 언론, 기독교, 문화, 기업, 권력 기관, 정당” 등 “보수를 지탱하던 일곱 개의 기둥”이 모두 “뿌리째 흔들”(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리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철학의 박종홍, 경제학의 남덕우, 사회학의 김경동 등이 보수 권력의 이념을 만들”었고, 그들의 제자들이 학계·관계·정계에 골고루 퍼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보수가 헤게모니를 쥘 수 있었지만, 뉴라이트들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새로운 이념’을 만들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16년 총선: 썩은 건물이 무너지다
2016년 총선은 그동안 쌓여온 보수의 취약성이 일거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은 40%대를 유지하고 있었고, 새누리당은 이전 선거처럼 계속해서 우위에 서 있는 구도라 자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자, 122석으로 참패했다.
무엇보다 서울과 경기도에서 새누리당은 패했다. 목동 신시가지가 있는 서울 양천구갑에서 처음으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잘 교육받고 소득이 높은 상위 중산층들이 보수를 외면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지난 선거와 비교해 새누리당 의석수는 서울은 16석에서 12석으로, 경기도는 21석에서 19석으로 줄었다. 민주당은 부산에서 5석, 경남에서 3석, 그리고 대구에서 1석을 얻었다. 보수가 의지하고 있던 지역 구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국민의당의 호남 석권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지역 제1당’의 장악력 약화와 지역 주민들의 반감을 의미했다. 또 새누리당의 패배는 야권이 분열된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안철수와 비주류가 떨어져 나와 결성한 국민의당은 기존 민주당 지지자뿐만 아니라 보수 성향 유권자도 상당히 빨아들였다.
2016년 총선이 중요한 이유는, 보수가 패배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했다는 데 있다. 정상적인 정당이라면 대선을 1년 8개월가량 앞둔 시점에서 총선에서 패배하면, 대규모 재정비가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당시 새누리당은 ‘포스트 박근혜’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다. 박근혜라는 구심점이 사라진 뒤 무엇을 내걸 것인가, 산업화 이후 시대의 보수 비전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없었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두 번의 승리가 산업화 서사의 재동원이었던 만큼, 그 서사를 체현하던 인물이 사라진 자리에 채울 것이 보수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구심점이 없는 보수는, 최순실의 태블릿PC가 보도된 뒤 발생한 심각한 권력 누수 상황에서 위기를 관리할 역량을 상실했다. 이 점에서 박근혜 탄핵과 2017년 압도적 대선 패배의 시작은 2016년 4월이었다.
2017년 대선과 그 이후 보수 정치 세력이 회복탄력성을 보여주지 못한 건 당연했다. 보수는 산업화 서사를 넘어서서 새로운 보수를 만들고, 새롭게 지지자 연합을 구축할 역량이 없었다. 이전에 한 번도 그렇게 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했다. 대선에서 바른정당 후보로 나선 유승민이 6.8%만을 득표한 것은, 이른바 ‘시장 보수’ 또는 ‘개혁 보수’가 얼마나 대중적인 기반이 없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보수는 차츰 한국의 선진국 진입 과정에서 소외된 이들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시장 보수는 이들을 대변하지도 않았고 박근혜와 같은 서사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선 이후 태극기 부대의 득세는, 보수 정당이 패배를 정치적으로 소화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그들은 보수 정당이라는 건물이 썩어서 무너진 뒤에 발생한 진공 상태를 메운 세력이었다. 태극기 부대는 회복탄력성 상실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였다.
2017년 ‘촛불 혁명’을 외치며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진입하면서 발생한 급격한 자산 가격 상승과 격차 확대에 무너졌다. 그런데 정권 교체를 성공시킨 주역은 바로 문재인이 발탁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었다.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문재인 정부와 충돌한 검찰총장이 반문재인 정서의 상징이 되었고, 보수는 그 상징을 영입했다.
뉴라이트가 미국 신우파의 담론을 빌려왔듯, 보수 정당은 이제 지도자 자체를 바깥에서 빌려오는 단계에 이르렀다. 빌려온 담론이 새로운 사회연합을 만들지 못했듯, 빌려온 인물도 보수 정당을 재건하지 못했다. 오히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이념’과 ‘투쟁’만을 강조하면서 보수를 막다른 길로 이끌었다.
윤석열에서 윤어게인으로: 극단적 복고주의의 말로
윤석열은 왜 망했는가? 윤석열이 어리석었다던가, 강경 보수 유튜브에 빠져있었다던가, 내부 권력 투쟁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것은 수면 위의 움직임만 보는 것이다. 수면 아래를 보면 보수가 ‘불임’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근본적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윤석열 정부의 정치는 그 기예의 수준이 낮았을 뿐이지, 큰 틀에서는 2016년 총선 이전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순수한 ‘우파’의 형태에 가까웠다. 윤석열이 2023년 “제일 중요한 것이 이념”이라며 “당정만이라도 국가를 어떻게 끌고 나갈 것인지에 대해 확고한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대통령실은 이 발언에 대해 “우리나라는 골프로 치면 250m, 300m씩 장타를 칠 수 있는 실력이 있는데, 방향이 잘못되면 결국 아웃 오브 바운즈(OB)밖에 더 나겠나. (…)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는 추가 메시지를 냈다. 2024년 총선에서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도 “자유민주주의를 헌법에서 빼내겠다는 의도를 가진 세력들과의 국가의 운명을 건, 시민의 운명을 건 건곤일척의 승부”라는 식의 메시지를 여러 차례 냈다.
지지자 연합을 늘리려고 하는 움직임도 거의 없었다. 윤석열이 총선을 앞두고 전국을 돌며 수십 차례 연 민생 토론회의 핵심 메시지는 부동산 가격이었다. 각종 규제 완화와 교통망 건설로 집값을 올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지주들이나 다주택자들이나 반길만한 이야기였다. 국민의힘 후보들은 수도권 선거에 대한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했다. 저소득층이 많이 사는 다가구·빌라 밀집지에 대해서 “저 지역엔 호남 사람들이 많아서 힘들다”는 식의 표현이 일상화됐다. 점점 험지가 되어가고 있는 서울과 인천 선거구에 대해서 ‘경기도화 되고 있다’라는 말도 내부에서 유행했다.(관련 칼럼: [에스프레소] 저소득층 동네에서 보수 정당 표가 나오려면)
결국 남은 것은 방어적, 복고적 이념 투쟁이었다. 총선 직전인 2월 개봉한 영화 <건국 전쟁>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이승만 다시 보기를 주제로 하고 있었고, 이승만을 대한민국을 세운 영웅으로 포장했다. 2000년대 중반 역사 바로 세우기부터 20년째 반복된 레퍼토리였다. 영화는 대한민국이 번영하고 있기 때문에 ‘국부’ 이승만을 긍정해야 한다거나, 좌파의 역사 왜곡에 대항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반복해서 내세웠다. 오히려 이 영화는 ‘우파’의 대중적 기반 상실을 은연중에 드러내기도 했다. 영화는 1954년 미국 순방을 이승만의 최고 순간으로 부각했다. 이승만이 미 의회에서 연설하고, 뉴욕 맨해튼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는 걸 엄청난 사건인 양 웅장한 음악을 써가며 부각했다. ‘국가 건설’을 미국이 인준해 주었으니 건국이 완성되었다는 서사인데, 평범한 한국 유권자에겐 설득이 될 리 없는 서사다.
윤어게인(윤석열 전 대통령의 복권) 운동에서 일부 개신교 세력이 주축이 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개신교가 가파르게 위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소수파가 되고 있다는 ‘세계관의 위기’가 방어적 정체성 정치를 가동시켰다. 세이브코리아를 주도한 손현보·유만석·홍호수 목사, 이용희 교수 등이 2024년 차별금지법 반대 집회를 조직했다는 게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은 다양한 대안 우파 활동과 결합했는데 대부분 이념 투쟁이나 문화 투쟁과 연결되어 있다.(관련 기사: "윤석열과 함께"…개신교 극우와 교회 쇠퇴의 역설)
지금의 국민의힘이 ‘집권할 수 있는 정당’을 꿈꾸기보다 ‘안락한 2등 정당’을 목표로 하면서, 내부 투쟁에 골몰하는 건 집권 가능성에 대한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로지 ‘보수’의 정통성을 차지하겠다는, 내부를 향한 투쟁에 골몰한다. 비상계엄에 반대하고 탄핵에 찬성했던 인물들이 축출되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고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나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등 보수 안에서 외연 확장을 시도한 인물들은 빨간색이 아닌 다른 색 옷을 입고 이번 지방선거에서 뛰고 있다. 보수의 마지막 기반이었던 대구에서도 김부겸 민주당 후보와 추경호 국민의힘 후보가 경합하는 것은, 그 결과 한국형 총보수가 가장 단단했던 곳에서조차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윤석열이라는 문제적 인물, 비상계엄 사태, 그리고 윤 어게인과 극우의 부상은 단순히 병리적인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1990년 형성된 한국형 총보수가 제대로 수선되지도, 변화하지도 못한 채 방치되면서 나타난 붕괴의 결과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승리는 보수의 구조적인 취약성을 가렸고, 뉴라이트는 보수의 과거를 정당화했으며, 그 결과 발생한 보수 노선의 공백은 태극기 부대나 유튜버들이 채우게 됐다. 결국 보수가 되살아날 수 있는지, 그리고 민주당 바깥에서 민주당에 대항하는 야당에 재건될 수 있는지는 비민주당 정치인들이 ‘카드로 쌓은 집’이 아니라 ‘단단한 주춧돌과 기둥을 가진 집’을 올릴 수 있는지에 달려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