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대학원신문 인터뷰] 범람하는 혐오표현과 사회적 낙인의 파장, 어떻게 할 것인가
고려대 대학원신문과 혐오 표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하고, 어떻게 대처·관리해야하는 지 인터뷰를 했습니다. 제목은 <범람하는 혐오표현과 사회적 낙인의 파장, 어떻게 할 것인가범람하는 혐오표현과 사회적 낙인의 파장,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범람하는 혐오표현과 사회적 낙인의 파장, 어떻게 할 것인가
‘혐오표현(hate speech)’에 대한 사회 각계의 반응이 뜨겁다. 스타벅스의 ‘탱크데이’ 논란과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일어난 배재고등학교 야구부의 지역 비하 논란에 대해 우리 사회는 이전보다 강렬히 반응했다. 스타벅스와 배재고등학교에서 사과 및 후속교육을 실시하였다는 점은 우리 사회의 역사적 감수성이 이전보다 풍부해졌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최근 한 여성 아이돌의 일상적 사투리를 둘러싸고 발생한 이슈처럼, 일각에서는 개인의 표현에 대해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혐오 세력으로 낙인찍으려는 ‘혐오몰이’의 시도도 확인되었다. 혐오표현은 분명한 사회적 문제이지만, 혐오와 무관한 개인에 대하여 사회적 낙인을 찍고 공격하는 행태 역시 또 다른 ‘혐오’의 모습은 아닐까. 과연 혐오 없는 사회는 어떻게 가능할까. 이에 본지에서는 혐오표현을 포함하여 한국의 여러 사회·경제적 기제를 연구해 온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조귀동 겸임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혐오표현의 문화적 소비, 어디에서 왔나
스타벅스와 배재고 등을 매개로 공식적인 공간에 드러났을 뿐 오늘날 혐오표현이 사회 일각에서 일종의 문화처럼 소비되고 있다는 점은 이미 암암리에 알려져 있었다. 타인에 대한 멸시를 담은 혐오표현은 한국에서 어떻게 확산되고 문화적으로 소비되어 온 것일까. 가장 먼저 혐오표현이 등장하게 된 맥락과 확산 경로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요청하였다.
“정치적 올바름의 대두와 궤를 같이하여 ‘혐오표현’이라는 명명과 개념화가 근래에 이루어졌을 뿐, 타자, 특히 약자인 타자에 대한 혐오는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사회적 계층, 인종, 성별, 종교에 이르기까지 나와 타인, 더 나아가 우리와 그들을 애써 구분하고자 했고, 그러한 성향은 쉽게 타자에 대한 배척, 멸시를 가능하게 하는 논리와 언어를 만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거리낌 없이 그런 표현을 써왔죠. 지금이라면 대단히 지탄 받을 소위 ‘꼰대’들의 정제되지 못한 언설들이 사회적인 용인 속에서 난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혐오표현이라는 것은 그 부적절성과 별개로 사실 유사 이래 항상 있었던 문제적 요소입니다.
다만, 혐오표현들이 현시점에 새로운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특정 문화코드를 가진 사람들이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결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던 1990년대와 급속히 확산되던 2000년대까지만 해도 인터넷은 억압적인 사회와 기성 문화에 저항하는 공간이었다는 점입니다. ‘디시인사이드’가 대표적인데, 기성 사회에 대한 불만들이 각종 패러디나 인터넷 공간만의 독특한 언어로 나타났죠. 그것의 속성은 혐오라기보다는 기존 문화를 전복하고자 하는 어떤 보편적인 청년문화의 한 형태에 가까웠고, 설명을 위해 편의적으로 나누자면 ‘진보적’인 성향을 띠었어요.
그런데 2000년대 중후반을 넘어서면서 어느 순간, 기성세대를 향하던 공격의 방향성이 타자, 또는 소수자 집단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특징인 조롱하는 어조라든가 유머를 섞는 형식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대상이 달라진 것이죠. 으레 그래왔듯이 조롱의 의도를 띤 ‘유머’ 코드에다 그들이 만든 혐오표현을 섞어서 그 집단 안에서 마치 놀이처럼 전유하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를 혐오표현의 ‘문화적 소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즉, 21세기를 전후로 인터넷이라는 편리한 문명의 이기를 타고 빠르게 확산되었다는 점, 특정 하위집단의 결속을 용이하게 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혐오표현이 소비되고 있다는 것 자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다만 요즘의 혐오표현이 나타나는 사례들을 보면 문제가 되는 특징을 짚어 볼 수 있습니다. 성별갈등을 심화하는 미국의 인셀(Incel)과 같은 사례를 보아도 그렇고, 한국에서 확인되는 중국에 대한 민족적 혐오, 부정선거론 등과 같은 근거 없는 음모론과, 그것에 근거하여 혐오와 공격을 정당화하는 주장은 현재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고 있죠. 대단히 정치화되고, ‘그럴듯하게’ 부풀려지며 혐오가 일상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혐오몰이와 낙인찍기가 초래하는 또 다른 ‘혐오’의 문제
갈등의 사안이 부풀려지고 빠르게 확산되는 혐오표현이 오늘날 중대한 사회적 문제인 것은 분명하나, 혐오표현을 ‘포착’한다는 명분으로 발생하는 ‘혐오몰이’ 또한 문제가 되고 있다. 발화자의 의도나 맥락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발음상 어구가 같다는 이유로 혐오표현 사용자로 몰아 타인을 공격하는 사례나,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빨갱이’, ‘극우’와 같은 사회적 낙인을 찍는 경우도 확인된다. 이는 민주사회의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마저 위배하는 상황일 터다. 이러한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지 질문하였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혐오표현만큼이나 의도를 가진 ‘혐오몰이’에 따른 피해자도 분명하게 확인되면서, 이제야 조금씩 사회적 논의가 진행되고 있죠. 저는 기존에 우리나라에서 혐오표현에 대한 적절한 가이드라인이 없었기 때문에 혐오몰이에 대해 필요한 논의가 지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혐오표현이 문제라고는 하지만, 정작 무엇이 혐오표현 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었던 것이죠. 합의된 기준이 없으니, 특정 개인이 필요에 따라 공적 장소에서도 혐오표현을 자의적으로 규정하고 억지로 밀어붙일 수도 있는 것이라고도 봅니다. 만약 공동체 내의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시도가 더욱 쉬울 테고, 혐오표현의 여부가 아니라 집단 내에서의 권력관계에 따라서 판단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기준의 부재는 혐오 자체에 대한 대응을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혐오몰이를 용이하게 합니다. 이를 적절히 시정하지 않으면 혐오몰이를 통해 공동체 구성원을 부당하게 배척하는 사례가 점점 더 늘어날 수 있습니다.
혐오와 혐오몰이의 구조는 사실상 동일합니다. 겉으로는 “혐오에 반대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 행동 방식은 타자를 집단적으로 공격하고 조롱하고 배제하는 혐오와 다를 것이 없죠.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혐오표현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메타인지’가 필요한데, 지금과 같이 각종 가치를 둘러싼 갈등이 다소 과열된 사회에서는 조금 어려워 보인다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라는 근본적인 가치와 연동하여 생각한다면, 가장 먼저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에서의 표현의 수위라는 것도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발화공간의 경계에 대한 적절한 기준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 지도층이 공적인 공간에서 실언을 하고도 전혀 사과하지 않거나, 배재고의 사례처럼 스포츠 경기 중에 수위 높은 혐오표현이 나오기도 하고, 사적인 공간인 인터넷 커뮤니티를 법으로 과도하게 규제하려는, 엇박자가 계속 나타나는 것이죠. 이렇듯 현재 한국에서는 혐오표현에 대해 말들은 많지만, 그다지 실효성 있는 대응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선진사회의 그늘?: 규제를 통한 혐오의 차단 가능성과 외국의 사례
혐오표현을 둘러싼 사회문제가 선진국의 그늘이라는 논평도 있다. 실제로 ‘헤이트 스피치’의 명명과 대응은 구미(歐美) 선진국에서 먼저 나타났다. 그런 만큼 외국의 사례를 참고하여 적절한 규제를 비롯한 대응방안을 만들어 볼 수는 없을까.
“미국과 서유럽이 먼저 비슷한 문제를 겪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례를 참고하면 될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그들의 맥락 속에서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와 대응이 나왔습니다. 이를테면, 구미 선진국의 혐오표현 규제는 특히 그들의 역사속에서 반복되었던 인종차별, 민족차별의 영역과 연관되어 있고, 특히 그러한 사안에 대해 강하게 규제하거나 증오범죄로 보고 처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적인 공간에서의 발화라는 조건을 전제로 합니다. 사적인 공간에서의 혐오표현에 대한 것은 특히 미국의 경우가 극단적인데, 피해를 본 개인이 스스로 민사소송을 통해 배상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해결 방식은 한국의 정서와는 다소 맞지 않죠. 더욱이 한국의 혐오표현이라면 인종이나 민족보다는 특정 지역이나 성차별을 매개로 한 것이 많았다는 점에서도 맹목적으로 서양의 사례를 따를 수만은 없는 이유가 됩니다.
다만, 그렇다 해도 참고할 부분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혐오와 증오를 그다지 구분하고 있지 않지만, 명백히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행위에 대해서는 혐오가 아닌 분명한 ‘증오’로 보고 처벌하는 시도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한편, 더 필요한 것은 ‘혐오’를 거대한 한 덩어리로 파악하기보다는, 사안과 맥락에 따라 구분하여 유효한 규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차별금지법’과 같은 거대하고 포괄적인 입법으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혐오가 쉽게 스며드는 일상의 공간은 법을 통해 문제를 일소하고자 하면 오히려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발언은 불쾌하거나 도덕적으로 부적절하더라도 동료의 비판과 사회적 규제가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타인을 모욕하거나 공동체의 규범을 해치는 경우에는 교육이나 계도를 거칠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공적 영향력이 큰 사람이 특정 집단에 대한 적대감을 조장하는 경우에는 제도적인 규제가 검토될 수 있으며, 실제 폭력이나 범죄로 이어지는 증오 행위에 대해서는 법적 처벌도 부과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가장 시급한 일은 수준별 ·상황별 혐오 및 혐오 표현에 대한 적절한 계선을 우리나라의 맥락에 따라 적절히 설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혐오를 넘어서는 것은 일상의 마주침으로부터
혐오는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혐오와 혐오표현에 대한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고 앞으로 혐오 없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제언을 부탁하였다.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인류사에서 아주 오래된 기원을 가진 혐오표현이라는 기제가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건강한 사회라면 공동체 구성원들의 합의와 실천에 따라 이를 ‘조절’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국민의 중요한 권리로 인정하는 오늘날의 성숙한 선진국에서는 이러한 접근이 더욱 적절하며, 이를 통해 혐오표현이 적어도 공적 영역에는 발붙이지 못하는 사회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는 혐오표현의 수준과 경계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혐오표현들은 대다수 특정 집단 내에서 ‘놀이’, ‘문화’와 같은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저급한 문화’에 동조하지 않고, 혐오표현이 집단 내 지지가 아니라 오히려 고립을 초래한다면, 잘못된 ‘놀이’도 점차 사라지지 않을까요. 저는 그 첫 단계로, 서로가 마주 보며 소통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상 속에서의 마주침을 늘려 타인이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같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지속적으로 환기하는 것이, 오늘날 범람하는 ‘혐오’를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천관우 기자 kw1045@naver.com
■ 김민준 기자 kmj0806@korea.ac.kr
(사진 출처: 인터뷰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