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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칼럼] 레트로 취미가 된 美 제조업 상징, 타자기

프로네시스리포트
- 11분 걸림

이번 조선일보 칼럼은 제조업 몰락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미국 타자기 산업을 가지고 써보았습니다. 요즘 타자기를 모으는 게 소소한 취미가 되었는데, 마침 1951년 생산된 미국산 타자기를 수리해서 하나 들이게 되어서요.

당연하게도 타자기는 소재일 뿐이고, 미국 타자기 산업의 성장과 몰락으로 보는 '탈공업화' 과정의 특성이 핵심 주제입니다. 한두개 산업이 경쟁력을 잃는 과정 것이 아니라, 연관 산업까지 덩어리지어진 형태로 무너지는 양상이 특정이라는 이야기.

AI·반도체 등 첨단 산업 뒤에 있는 여러 제조업 생태계를 돌보지 않으면, 화려한 첨단 제조업도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만 독야청청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 이야기를 꺼낸 건 한국 제조업이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지 않나 해서입니다.

일단 칼럼을 보시죠.


[에스프레소] 레트로 취미가 된 美 제조업 상징

20세기 초 기계공업 최첨단
타자기의 몰락을 보면 씁쓸해
반도체와 증시 호황에 가려진
K제조업 경쟁력 상실 경계를

한글 활자로 개조된 1951년산 레밍턴 타자기(왼쪽)와 1941년산 로열 KMM 타자기. /조귀동 경제칼럼니스트

어쩌다 기계식 타자기를 모으는 게 취미가 됐다. 손가락으로 또박또박 한 글자씩 제대로 눌러야 활자가 찍히는 방식이 매력적이었다. 가상 현실 같은 컴퓨터 모니터와 달리, 손 근육을 움직이고 손가락 끝이 눌리는 감각에 물성(物性)이 느껴졌다. 레버·태엽·스프링·톱니바퀴 등 수천 개의 부품이 맞물려 움직이는 메커니즘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타자기는 19세기 후반~20세기 중반 기계공업의 최첨단 제품이었다. 그리고 당시 제조업 강국이던 미국 회사들이 선도했다. 2주 전 수리를 받고 사무실에 들인 15㎏짜리 레밍턴 타자기가 대표적이다. 1951년 7월 뉴욕주 일라이언 공장에서 생산됐고, 60년대 한글 활자로 개조돼 인천에서 쓰였다. 업력이 수십 년인 전문 수리공은 “이렇게 부품들이 정밀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제품은 오랜만”이라고 격찬했다. 그 옆에 있는 1941년산 철제 로열 KMM 타자기도 여전히 또렷하게 글씨를 찍어낸다.

레밍턴은 소총 제조 회사에서 시작했다. 총기 산업은 미국 기업들이 정교한 기계 부품을 절삭·판금 등을 통해 오차 없이 대량으로 생산하고, 이를 조립하는 역량을 키우는 요람 역할을 했다. 레밍턴은 재봉틀, 자전거, 농기구, 타자기 등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지금도 사용하는 QWERTY 자판을 산업 표준으로 만든 회사도 레밍턴이다. 로열, 언더우드, 스미스코로나 등 다른 회사도 거대한 기계공업 생태계에서 성장했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미국 타자기 산업은 가파르게 몰락했다. 먼저 생산비가 낮은 해외 공장으로 이전했다가, 브라더·나카지마 등 일본 회사에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을 맡겼다. 1970년대 중반이 되자 일본산 제품에 브랜드만 붙여서 파는 지경이 됐다. 결국 뉴욕, 코네티컷 등에 모여 있던 타자기 공장은 모두 문을 닫았다. 다른 기계공업들도 비슷한 궤적을 밟았다. 이렇게 사라진 기계공업 생태계를 복원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미국이 배 한 척 제대로 못 만드는 처지로 전락한 시작점도 1960년대다.

이런 산업사를 보고 있으면 한국 제조업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반도체가 초호황을 누리고 있다지만, 제조업 전반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구자근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국가 산업단지에서 휴·폐업한 기업은 1090곳으로 집계됐다. 2017년 132곳보다 8.3배나 늘어난 수치다. 구미 산업단지는 지난해 생산액이 2014년 수준으로 회복했지만, 가동률은 64.3%로 최하위다. 반도체, 방산 등을 제외한 나머지 업종이 부진해서다. 고용도 10여 년 전보다 20% 이상 줄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誌)마저 지난달 한국·일본·대만의 제조업 경쟁력 상실이 AI 호황에 가려져 있다고 지적했다.

제조업 위축은 한 산업에 그치지 않는다. 일단 산업 생태계가 무너지면 좀처럼 회복되지 못한다. 그래서 제조업이 제공하는 양질의 일자리가 한꺼번에 사라질 수 있다. 또 제조업이 뒷받침되어야 AI와 반도체 산업도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 평택과 이천의 반도체 공장을 짓는 용접공 상당수는 부산·울산·경남의 조선소와 플랜트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다. 화학·소재·전자·정밀기기 산업이 중요한 건 불문가지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만 독야청청 잘나갈 수 없다.

한국 사회의 관심은 AI와 반도체, 증시에 쏠려 있다. 정작 경제를 조용히 떠받쳐 온 제조업의 위축에 관한 이야기는 점차 줄고 있다. 레트로(복고) 취미로 소비되는 물건 중 상당수는 1970~80년대 유럽·일본산 전자·광학 제품이다. 그들의 좋았던 시절이 응축된 물건이라 꽤 씁쓸하다. 그런데 이게 다른 나라 이야기에만 그친다는 보장은 없다. 20~30년 뒤 한국 기업들의 제품이 비슷한 취급을 받을까 두렵다.


왜 타자기를 소재로 삼았나

타자기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의 기계 공업의 최첨단에 서 있는 기계이고, 화이트칼라 일자리의 기계화-자동화의 시작점이죠. 그런데 이 정교한 기계 장치를 만드는 회사들을 보면 연관 산업의 강자들이 많습니다.

레밍턴의 타자기 공장 / Chemung County Historical Society

레밍턴의 경우 1816년 총기 회사로 시작해서, 재봉틀·농기구·자전거·타자기로 사업이 확대되고 20세기 초가 되면 회계기·금전등록기·기타 사무기기까지 생산합니다. 사업 영역은 다르지만 각각의 제품들의 내부 메커니즘이나 제품에 필요한 역량 등에서 확장이 용이해서죠. 다른 타자기 회사인 스미스코로나도 기원은 산탄총 회사(L.C.스미스)입니다. 19세기 후반 등장한 이른바 ‘미국식 생산 방식’의 원조가 총기 생산인 것도 궤를 같이하고요.

다른 나라들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독일의 반더러-베르케(Wanderer-Werke, 컨티넨탈 타자기)나 트라이엄프 등은 자전거, 일본의 브라더, 나카지마, 실버세이코는 방직기나 편물기(뜨개질 기계), 프랑스 자피(Japy)나 스위스 헤르메스는 시계에서 출발했습니다.

미국 제조업 고용 비중

그리고 1960년대 이후 미국 타자기 산업이 해외로 이전하고, 생산을 아웃소싱하고, 경쟁력을 잃어가는 과정은 다른 기계공업 전반과 연관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탈공업화(deindustrialization) 과정이 개별 산업 단위가 아니라 여러 산업들이 동시에 쇠퇴하는, 일종의 생태계 그 자체의 몰락 과정이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수치제어기계(NC)를 비롯한 공작기계 산업도 비슷하게 미국이 몰락하고 주도권을 잃어가고요. 타자기 산업이 1960~1970년대 전자식 타자기-워드프로세서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쇠퇴했다기보다, 미국 기계공업 몰락의 일부분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제조업 문제, ‘구조적 연쇄성’ 주목해야

따라서 제조업 문제를 다룰 때는 일종의 ‘구조적 연쇄성(structural cascading)’ 문제를 중요하게 봐야하지 않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A라는 산업의 위축이 B라는 다른 산업의 위축을 낳는, 그리고 제조업 생테계 전반으로 번지는 데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제조업이 처한 어려움은 단순한 몇몇 산업의 경쟁력 상실에 그치지 않고 전반적으로 압력이 강해진 상태이기도 하죠.

/한국일보 캡처

그리고 이는 탈공업화라고 이야기할만한 상황을 겪고 있는 한국 제조업의 위기가 반도체를 비롯한 다른 산업까지 빠르게 확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까운 미래에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국내에서 관련 협력업체나 인력이 없어서 반도체 공장을 못 짓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코노미스트까지 경고하는 한국의 제조업 위축

다들 AI나 반도체 이야기를 하지만, 실제로 제조업 위축은 지속적이고 강도 높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나 5월 27일 ‘일본, 한국, 대만은 제조업 쇠퇴에 고전하고 있다(Japan, South Korea and Taiwan are suffering industrial rot)’라고 쓴 기사가 대표적이죠. 반도체와 AI 서버를 제외하면 다른 부문의 수출이 40% 줄어든 대만이 대표적입니다. 반도체를 제외하면 산업 생산이 계속 부진한 것이 세 나라에서 공통적이고요.

시장을 보는 눈 : 네이버 블로그
이코노미스트 기사를 소개한 홍춘욱 박사님 블로그

결국 이 반도체 호황이 지나고 난 다음에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 탈공업화 문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지금부터 대책을 세워도 늦을 거라는 게 문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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