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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미답] 유럽의 쇠퇴, 국가의 역할을 다시 묻는다

프로네시스리포트
- 9분 걸림

이동수 세대정치연구소 대표(전 청년정치크루 대표)께서 싱크탱크 <전인미답(https://jimd.kr)>을 만드시고, 필자들을 모으셔서 거기에 참가해 글을 하나 쓰게 되었습니다. 제목은 <유럽의 쇠퇴, 국가의 역할을 다시 묻는다>입니다.

유럽의 쇠퇴에 대해서 보수 쪽은 사회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은 유럽형 모델의 패배라고 주장하고, 진보 쪽은 이전부터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상당히 주장하는 거 같은데....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서유럽과 미국이 '제1세계'로 하나의 단일 시장을 창출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결국 유럽의 경제적 성취가 어떻게 가능했가부터 질문을 던져야하지 않을까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게 된 이유는 물어봐야 할 테고요.

이 지점에서 저는 결국 '국가의 역할', 정확히 말해 공급 측면에서의 국가의 역할을 더 이상 제대로 수행하지 않게 된 유럽 각국의 문제를 중요하게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도 지금 물어야 할 질문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정말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단순히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경제와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역량을 제대로 공급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칼럼은 다음과 같습니다. 독자 여러분, 주말 잘 보내십시오.


한때 『유러피안 드림(제레미 리프킨 저·2004년 출간)』이라는 책까지 있었을 정도로 선망의 대상이었던 서유럽은 이제 조롱의 대상이다. 좀처럼 침체에서 벗어나지 않는 경제, 나날이 하락하는 국가 경쟁력, 커지는 빈부 격차, 그리고 그 결과 늘어나는 사회 갈등과 정치적 불안정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 미국과 EU(유럽연합)의 GDP(국내총생산·명목 기준)는 각각 15조500억달러와 14조6500억달러로 엇비슷했다. 그런데 2025년에는 30조7700억달러와 21조2300억달러로 차이가 벌어졌다. 영국의 EU 탈퇴를 감안하더라도 EU 27개 국가의 경제력은 이제 미국의 69% 수준에 불과하다. 시가총액 상위 50대 기술 기업 가운데 EU에 본사를 둔 곳은 4곳밖에 없다. R&D 지출에서도 미국 기업은 EU를 앞선다. 게다가 중국 기업들이 치고 올라오면서 유럽 기업을 밀어내거나, 아예 사들여 자회사로 편입시키기까지 한다. 유럽에서 청년 실업, 교육 불평등, 주거난에 시달리지 않는 나라를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심지어 모범적인 복지국가였던 스웨덴은 이제 총기와 사제 폭탄까지 동원되는 범죄가 횡행하는 곳이 됐다.

유럽의 쇠퇴에 대해 많은 사람은 유럽식 시스템, 즉 적극적으로 경제·사회 영역에 개입하는 국가와 비대한 사회복지의 문제라 지적한다. 무리하게 ‘큰 정부’를 고집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 정체된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1990~2000년대 신자유주의 개혁에 원인을 돌리는 이들이 있다. 무리하게 민영화를 추진하고 시장 논리에 맡기면서 기업들이 단기 이익 극대화에 매몰되고, 제조업 등을 포기한 결과 아니냐는 것이다. 이들은 후술할 SOC 투자가 되지 않는 것도 ‘작은 정부’의 문제로 지적하곤 한다.

그런데 유럽병의 실상을 보면, 양쪽 진단 모두 틀렸다. 과도한 규제, 복지, 큰 정부의 문제도 아니고, 신자유주의가 원인이라고 볼 수도 없다. 오히려 국가가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답에 가깝다. 특히 에너지, 물, 도로 및 철도 나아가 교육 등 경제·사회 인프라에 투자를 게을리한 것이 각국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다. 21세기의 ‘유럽병’은 국가가 경제 개발과 사회 통합에 필요한 역량을 확보,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란 얘기다.

영국은 만성적인 SOC 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증기기관차와 철도의 발명국이면서, 고속철도는 프랑스로 가는 노선 하나뿐이다. 런던~버밍엄~맨체스터~리즈를 잇는 HS2 고속철도 사업이 추진됐지만, 사업비가 폭증하면서 1단계인 런던~버밍엄 구간을 제외하면 모두 취소됐다. 노선의 ㎞당 비용은 이탈리아의 4배, 프랑스의 8배 수준에 달한다. 인프라 투자가 없으니, 건설회사의 역량이 부족하고, 건설 비용을 높여 신규 투자를 막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2017년 첫 삽을 뜬 뒤 완공일이 계속 늦어지는 힝클리포인트C 원전 같은 사례도 있다. 그나마 대규모로 가동되는 발전소는 죄다 LNG(액화천연가스)이다 보니 유럽에서도 전기 요금이 비싸고, 고스란히 산업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진다.

바다 건너 프랑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수십 년 된 다리가 제대로 수리되지 않아 폐쇄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만, 새 다리는 건설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문제는 교육이다. 프랑스 교육부 통계국(DEPP)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중·고교 전체 수업 시수 가운데 7%가 교사가 없어 결손이 났다. 한 명이라도 교사 결원이 있는 학교가 전국의 55%에 달할 정도다. 수업 결손은 저소득층 지역일수록 심각하다. 교육비 지출은 GDP의 5.4%에 달하지만, 그중 10분의 3가량이 교사 연금에 쓰이는 기형적인 지출 구조가 원인이다. 그 결과 OECD 국제 학업 성취도 평가(PISA)에서 프랑스 학생들의 읽기 성적은 2000년 평균 505점에서 2022년 474점으로 하락했다.

그런데 공교육 붕괴는 부유층이나 엘리트층 자녀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파리의 유서 깊은 리세 앙리 4세(The Lycée Henri-IV) 같이 그랑제콜(일반 대학과 분리된 엘리트 대학) 과정과 긴밀히 연관된 중등학교에 보내기 때문이다. 아니면 예수회 등이 운영하는 명문 사립학교라는 선택지도 있다. 이들 학교는 각종 기부금을 받을 수 있고, 동문이나 학부모가 CEO인 기업들은 세금 감면 혜택을 받아 가며 거액의 후원금을 낸다. ‘엘리트’와 ‘대중’의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 보니, 연금같이 ‘대중’에 대한 재분배 제도를 손대려 할 때는 정치적 저항이 거세다. 2018년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의 유류세 인상에 대한 전국적인 항의 시위(노란 조끼 시위)가 동북부의 몰락한 제조업 지대, 빈부 격차가 심한 남부 해안 지대, 시골·중소 도시에서 집중된 이유다.

1950~60년대 서유럽 경제의 빠른 성장은 국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한 덕분이었다. 2차 세계 대전 직후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유럽의 생산성은 미국에 한참 못 미쳤고, 도로·철도·항만 등 인프라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고등학교와 대학 진학률이 낮았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SOC와 인적자본에 대한 공공 투자가 크게 늘었다. 국가 역량의 확대가 경제 발전을 이끌었기에, 복지국가도 가능했다. 2000년대 들어 유럽 각국 정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독일만 해도 2004년 이후 감가상각을 제외한 순공공투자가 제로 수준이었다.

유럽의 실패는 국가가 공급 측면에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잘 보여준다. 양질의 인적자본, SOC 공급은 물론이고 연구개발(R&D)에서도 국가는 중요한 행위자다. 한국도 지금 정부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물을 때가 됐다. 에너지, 인프라, 공교육, 기초연구 등에서 경제 구조 변화에 발맞춰 정부는 제대로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가? 단순히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거나, 광역 행정구역을 조정하면 된다거나, 아니면 지역화폐같이 전통적 소상공인에 현금성 지원을 하는 게 유효한 서민 경제 회복책이라거나 하는 논쟁 구도는 그래서 아쉽다. 2026년의 한국 사회가 이제 정말로 물어야 할 질문은, 본질적인 국가의 역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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